당일치기로 ‘롬복 쿠타’에 다녀왔다. 발리 화산문제로 구정기간의 예약이 죄다 취소되어, 몇 년만에 처음으로 할 일 없는 구정을 보내게 된 것이다. 남들 쉴 때 같이 쉴 수 있어 연휴기분이 나기도 하지만, 백 개가 넘게 취소된 예약을 생각하면 지옥같기도 하다.
원치 않은 강제 연휴를 집에서 할 일없이 보내기가 아쉬워 당일치기로 가족과 함께 롬복 남부 쪽을 다녀오기로 한 것인데, 이걸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다가 그냥 좋아하기로 했다.
조금 늦은 아침, 간단히 짐을 챙긴 뒤 차에 몸을 실었다.
발리가 아닌 롬복 쿠타 (Kuta)
‘쿠타 (혹은 꾸따)’라고 하면 사람들은 발리의 화려하고 북적거리는 쿠타, 혹은 인접해 있는 서핑의 메카 ‘쿠타비치’를 먼저 떠올리지만, 이곳 롬복에 사는 우리는 남부에 있는 ‘롬복 쿠타 (Lombok Kuta)’를 먼저 떠올린다. 같은 이름의 ‘쿠타 ‘지만 발리와 롬복은 그 느낌과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쿠타는 집에서 1시간 30분 가까이 걸리는 롬복 섬의 남쪽 끝. 업무 상 종종 가는 나를 제외하면 아내와 아이들은 1년 중 갈 일이 거의 없는 꽤 먼 곳이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에는 오히려 나보다 아내와 아이들이 더 자주 쿠타에 가곤 했었다.
당시 쿠타에 있는 노보텔 리조트의 총지배인이 한국 분이었는데, 그쪽 아내 분이랑 우리 와이프랑 무척 친하게 지내던 터라 서로의 집을 자주 왕래했기 때문. 우리 와이프가 그 집에 놀러가면 집이 맞긴 맞는데, 한편으론 고급 리조트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어휴 늦었는데 그냥 자고 가요.’와 같은 흔한 일상의 대화가 좀 묵직하고 부담스럽게 들렸다(고 아내가 전했다…). 숙박비를 내야하나 어째야 하나, 반 값이라도 내야하나, 분명 그냥 자라고 할텐데 그러면 (집이 아닌)호텔에 민폐 아닌가, 반 값이라도 내야하나.. 와 같은 혼자만의 고민들이었다고..
하지만 이젠 그분들이 롬복을 떠난지 이미 2년이 지났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쿠타까지 내려갈 일이 거의 없었다. 덩달아 아내의 쓸 데없는 고민도 없어졌다.
꾸따의 예쁜 식당, 켄자카페에서 점심
핑크퐁의 상어가족 노래를 한 시간 넘게 듣다보니 어느덧 쿠타 타운에 도착했다. 거의 1년 만에 왔다하지만 엄청나게 변화된 거리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작은 거리는 외국인 여행자들과 젊은 서퍼들 그리고 세련된 카페와 식당으로 활기가 넘쳤다. 내가 알고 있던 그 꾸따가 아니었다.
골목길 식당에서는 외국인 여행자들이 테이블에 앉아 커피와 차를 마시고, 지금 막 자리에 앉은 늘씬한 커플은 메뉴판을 보고 음식을 주문하고 있었다. 종업원들은 바쁘게 주문을 받아내고, 주방으로 주문을 다시 외치며 테이블로 접시를 나르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그늘 진 식당 안으로 들어온 쿠타의 햇살만큼 밝았다.
곳곳의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이 작은 거리로 흘러넘치는 덕분에 오전내내 머릿 속을 맴돌았던 상어가족 멜로디는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켄자카페. 쿠타 사거리 코너에 있는 파스텔 톤의 레스토랑이었는데, 최근 가 본 식당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이다. 맛도 맛이지만 독특한 인테리어에서 풍겨 오는 낯선 곳의 냄새가 나던 곳이다. 롬복에 있지만 롬복 같지 않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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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복 쿠타 비치의 눈부신 아름다움이란..
다시 차에 올라 비치로 향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새파란 하늘아래,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바다가 보였다. ‘쿠타비치’다. 우리는 한쪽에 차를 주차하고, 새로 단장된 거리를 가로질러 해변으로 향했다.
‘만달리카 프로젝트’라고 하는 정부 관광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지 얼마 되지 않아, 꾸따비치는 이전과 비교해 한결 세련된 모습으로 탈바꿈 했다. 나와 아내는 ‘꾸따가 이렇게 멋진 곳이었나?‘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마치 보잘 것 없던 주인공이 어떤 계기로 때 빼고 광내자 가려져 있던 본연의 멋진 모습이 드러나고, 주인공을 무시하던 주변 사람들이 놀라는, 뭐 그런 드라마 속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운 밀가루를 흘린듯한 하늘의 구름을 따라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뜨거운 적도의 햇살이 해변의 모래와 바다 표면에 반사돼 가뜩이나 그늘 없는 해변 주변이 더 밝아졌다.
방탄소년단의 노래 가사처럼 정말 ‘하늘이 파래서 햇살이 빛나서’ 눈을 뜨고 있기 힘들 정도였지만 이럴 줄 알고 우리 가족은 모두 선글라스를 챙겨왔다. 선글라스가 없다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난감했을 정도로 주변의 모든 것들이 너무 밝게 빛났다.
끈질긴 잡상인이 들끓던, 오로지 ‘바다만 예뻤던’ 꾸따비치가 불과 1~2년 사이에 이렇게 멋진 모습으로 바뀌었을 줄이야. 이곳은 몇 년전만 해도 관광객 티를 내고 이곳을 걸어다닐 엄두를 내기 힘들만큼 정말 엄청나게 많은 잡상인들의 횡포에 가까운 강매로 악명을 떨쳤던 곳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그들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리고 어찌보면 관광지에 잡상인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관광지와 잡상인은 공생의 관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관광객 수의 몇 배에 가까운 잡상인과 삐끼들이 몰려다니며 거의 강매에 가까울 정도의 끈질김(몇 시간이고 따라다닌다)으로 사람들을 짜증나게 했던 곳이 바로 이곳 꾸따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변화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과거 꾸따를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더도 말고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아무런 방해없이 이렇게 꾸따 해변에 서있는 것이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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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놀이터가 생뚱맞게 해변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 깨끗한 해변에 놀이터라니.. 좋긴 좋은데.. 뭐랄까, 너무 사치스럽다는 생각? 공간이 엉뚱하게 낭비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꾸따 ‘거꾸로 집’에서 똑바로 서 있기
꾸따비치에서 다시 마타람으로 향하는 길. 일전에 사무실 직원들이 인스펙션을 다녀온 ‘루마 떠르발릭 (Rumah Terbalik)’이라는 곳이 이 근처였던 것이 생각났다. 왔던 길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니 거꾸로 세워진 집이 보였다.
여기다, ‘루마 떠르발릭’.
‘루마 (Rumah)‘는 ‘집’이라는 뜻이고 ‘떠르발릭 (Terbalik)‘은 ‘뒤집어진’이라는 뜻이다. 우리 말로 ‘거꾸로 된 집’ 정도의 의미.
거꾸로 집은 각각의 테마를 가진 총 10개 정도의 방으로 구성돼 있다. 방에 들어가면 가구들이 모두 천장에 매달려 있는데, 나중에 사진을 거꾸로 돌려볼 것을 고려하여 적당히 자세를 취하고 사진을 찍으면 된다.
나도 그렇지만 애들도 무척 신기해 했다. 문제는 왜 이 가구들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지 묻는 아이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인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간단한 설명 뒤에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니 그제서야 감을 잡고 포즈를 취한다. 하지만 애들이 작아서 천장에 붙어있는 책상에 손을 댄다거나 상상한대로 그림이 안 나온다.
방도 너무 작아서 사진을 제대로 찍으려면 벽을 뚫고 나가야만 가능할 정도로 비좁았다. 아, 그리고 방들은 어찌나 더운지.. 그래도 재밌다고 포즈 취하고 사진 찍은 뒤 어떻게 나왔나 사진 보여달라고 땀 흘리며 조르르 달려오는 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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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집에서 잔뜩 진을 뺀 뒤, 옆에 새로 생긴 예쁜 카페에 앉아 쥬스를 마시며 숨을 돌렸다. 애들이 점점 키가 자라서 그런건지 내가 체력이 약해진건지 몇 번 안아 올렸다고 이렇게 힘이 든다.
밖의 햇살은 여전히 뜨거워도 그늘에 들어서면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식혀준다. 깨끗한 공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적당한 크기의 음악소리, 저녁장사를 준비 중인 카페의 종업원들..
곧 있으면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때라 ‘거꾸로 집’에 다시가자는 애들을 잘 다독여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올라오는 길에는 잊고 있던 상어가족 노래를 한 시간 가량 다시 듣긴 했지만, 돌이켜 보면 오늘은 정말 멋진 하루였다. 이게 다 ‘쿠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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